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회빈 강씨 (문단 편집) === 신혼생활과 병자호란 이전까지 === [[동궁일기]]는 그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결혼 초 강빈이 [[소현세자]]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선 거의 단서를 주지 않는다. 일기라는 용어가 현대에 주는 이미지와 달리 [[소현세자]] 본인이 직접 쓴 일기가 아닌데다, 내용도 당대 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주제에 한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. 그날의 날씨, [[소현세자]]의 학문 진도, 서연을 했는지 여부, [[소현세자|세자]]가 참여한 주요 왕실 행사 등이다. 따라서 신혼 초 [[소현세자]]와 강빈 간의 부부생활이나 정서적 교류가 어떠했는가는 상상이나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. 상술했듯이 적잖은 창작자들이 [[소현세자]]가 신혼 초에 꽤 오랫동안 강빈을 냉대했다고 상상했다. [[조선왕조실록]]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첫아들인 원손 [[경선군|이석철]]이 결혼한지 9년이나 지난 [[1636년]](인조 14년), 태어났기 때문이었다. 그 이유에 대해 창작자들은 [[소현세자]]가 2년 전 최종 간택까지 통과했다가 파혼당하고, 13살에 자결한 윤의립의 딸에 대한 죄책감을 못 잊어 강빈을 냉대했다고 상상했다. '''하지만 이는 [[승정원일기]]와 [[동궁일기]]가 번역되기 전 벌어진 일종의 고증 오류다.''' 소현세자와 강빈은 [[조선왕조실록]]에 남은 장남 [[경선군|이석철]]이 태어나기 전 2명의 딸을 두는 무난한 어린 부부의 모습을 보였다. 특히 장녀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난 [[1628년]](인조 6년) 12월 태어났다.[* 1628년 12월 24일 산실청을 철거했다는 [[승정원일기]] 기록, 그리고 [[동궁일기]]에 12월 17일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다. [[동궁일기]]에는 '중전'이 출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, 학자들은 빈궁의 오기로 결론내린 듯 하다. 직후 시강원 스승들이 빈궁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이 있는데다, [[인열왕후]]는 이듬해 7월에 대군을 출산했기 때문에 달수가 안 맞기 때문이다. 양력으로는 1629년 1월10일에 출산.] 따라서 실제 기록만으론 [[소현세자]]가 신혼 초 강빈을 냉대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. 설령 [[소현세자|세자]]가 정말로 창작자들의 상상처럼 윤의립의 딸에게 죄의식을 느꼈다 한들, 길어야 두어 달 만에 --하찮은 저항-- 강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. [[동궁일기]]에선 신혼 초부터 [[소현세자]]와 강빈의 사이가 꽤 좋았음을 암시하는 듯한 --좀 웃기는-- 대목이 있다. 강빈과 가례를 치른 그 해인 [[1628년]](인조 6년) 11월경 17살의 [[소현세자]]는 명확히 이유가 쓰여있지 않은 채 이틀에 한번 꼴로 수업을 빼먹는 생활 패턴을 보였는데, 그무렵 열린 조강례에 참여한 정경세라는 스승이 [[소현세자]]에게 '부드럽고 깨끗한 기상이 예전만 못하시다. 추위 탓이냐, 아니면 조섭(몸조리)을 못하신 탓이냐'라고 개쪽을 준 것이다. 참고로 조섭을 못했단 말은 현대엔 익숙하지 않은 용어다. 병을 앓다가 회복되는 환자가 기력 회복을 위해 여러모로 조심하는 걸 조섭한다고도 하지만, 당시 [[소현세자]]는 의료기록상 잔병 하나 없었다. 그리고 [[효종(조선)|효종]]이 사용했던 맥락을 참조해 해석하면 '조섭을 못했다'는 성적 코드를 점잖게 숨긴 단어다. 즉, 강빈과 [[성관계|잠자리]]를 너무 자주 가지는 거 아니냐고 시강원 스승에게 까였단 말이다. [[1628년]](인조 6년) 말에 태어난 장녀는 기록이 너무도 간략하고 파편적이라 당시 산실청을 세울만한 왕실 여인이 누구였냐는 소거법과 훗날 기록된 군주의 사망기록을 통해 간신히 강빈의 딸임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. 정식으로 봉군되지 못하고 아명도 전해지지 않는 이 딸은 13살이 되던 해인 [[1640년]](인조 18년)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, 훗날 [[소현세자]]와 강빈이 [[청나라]]에 볼모로 끌려갈 때 왕궁에 홀로 남아 할아버지 [[인조]]의 귀여움을 받았던 듯 하다.[* [[1640년]](인조 18년) [[1월 5일]] 군주(세자의 적녀)가 사망했고, 이로 인해 [[인조]]가 상심했단 기록이 [[승정원일기]]에 있으며, 또 [[1640년]](인조 18년) [[1월 25일]] [[심양일기]]에 군주의 부음이 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. 시간상으로 보면 [[조선]]에서 죽은 딸의 소식이 이무렵 [[심양]]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.] 반면 2년 후인 [[1631년]](인조 9년) 7월에 태어난 차녀는 [[승정원일기]]와 [[동궁일기]] 양쪽으로 강빈의 딸임을 명시하는 기록이 충분히 있다. [[원손]]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상당했고 군주로 태어났지만 상당히 축하를 받은 흔적이 엿보인다. 하지만 이때 태어난 차녀는 3달도 안돼 갑자기 세상을 떴다.[* 일각에선 [[1628년]](인조 6년) 태어난 딸이 이때 죽었고 [[1631년]](인조 9년) 태어난 딸이 [[1640년]](인조 18년) 죽었다고 기술되기도 했는데, [[동궁일기]]를 근거로 하면 이때 죽은 건 명확히 새로 태어난 '신생' 군주다.] 그리고 딸의 사망날을 전후로 [[소현세자]]도 등과 허리 부상 때문에 치료를 받아가며 꽤 오랫동안 서연을 쉬었다. 이 부상의 원인, 혹은 갓난 딸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[[동궁일기]]와 [[승정원일기]]의 건조하고 반복적인 기술로는 전혀 맥락이 파악되지 않는다.[* 이런 부분에서 [[조선왕조실록]]이 사료로서 더 나은 점은 당대 사람들이 눈으로 맥락을 정리해서,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이해시켜 준다는 것이다. 다만 [[조선왕조실록]]은 그 시대 관점에서 더 중요한 맥락만 다루기 때문에, 이 손녀의 죽음 소식에 놀란 [[인조]]가 태묘의 동향대제를 중지했다는 것만 제대로 기술되어 있다.] 이후 [[소현세자]]와 강빈 사이에선 약 4년간 출산 기록이 없다가 [[1635년]](인조 13년) 강빈이 셋째를 [[임신]]한다. 이렇듯 [[동궁일기]]라 해도 [[조선/왕실|왕실]] 가족들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, 있어도 너무도 단편적이라 제대로 된 맥락은 읽기 어렵다. 하지만 크게보면 신혼기를 거쳐 [[병자호란]]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, 강빈은 [[소현세자]]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으며 차기 [[왕비|국모]]로서 상대적으로 무난한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. 그러던 중 강빈은 [[1636년]](인조 14년) [[3월 25일]]에 셋째이자 장남인 [[경선군|이석철]]을 [[출산]]하였다. [[경선군|원손]]의 탄생은 나라에 큰 경사였지만 신하들이 하례드리는 행사는 생략하고, [[조선/왕사|왕위 계승]]에 근심이 없어지고 [[종묘]]의 [[제사]]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교서만 내렸다. 하필 이때가 [[인열왕후]]의 국상 중이라[* [[인열왕후]]는 [[1635년]](인조 13년) [[12월 5일]] 출산하였으나 이때 낳은 왕자는 바로 사산해 죽고 [[인열왕후]]도 그에 대한 충격으로 위독해졌다가 [[12월 9일]] 결국 [[사망|승하]]했다.] [[소현세자|세자]]는 상주로서 의례 절차와 [[제사]] 준비로 한창 바빴고, 강빈은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[[내명부]]를 총괄해야 하는지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. 다만 [[경선군|원손]]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[[인조]]는 별시를 열었다.[* [[인조실록]] 32권, 인조 14년([[1636년]]) 4월 14일 무자 1번째 기사][* 이후 강빈은 [[청나라]] [[심양]]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시절인 [[1637년]](인조 15년) 3녀 [[경숙군주]], [[1640년]](인조 18년) 2남 경완군 석린, [[1642년]](인조 20년) 4녀 경녕군주, [[1643년]](인조 21년) 5녀 경순군주가 [[청나라]] [[심양]]에서 출생했고 [[1644년]](인조 22년) 10월 [[베이징시|북경]]에서 3남 [[경안군]] 석견을 낳았다. 2남 3녀를 낳고 [[조선]]으로 영구 귀국 후 [[1645년]](인조 23년) 3월 경 아들을 [[임신]]하나, 소현세자 사후 유복자가 되고 충격으로 유산한다.] 아무튼 [[1636년]](인조 14년)에 시어머니 [[인열왕후]]가 사망한 후, 강빈은 얼떨결에 [[조선]]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이 되었다. 물론 시아버지 [[인조]]는 [[왕비|국모]]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입장이었고 [[인열왕후]]의 상이 끝나는 1-2년 내지 길어야 3년 내에 새 중전을 맞이할 것으로 여겨졌다.[* 나중에 --상복 배틀-- [[예송논쟁]]의 단초가 될 [[장렬왕후]]가 이 새 중전으로, [[병자호란]]이 끝난 후인 [[1639년]](인조 17년)에 15살 때 [[인조]]와 혼인했다. 하지만 [[인조]]는 큰손녀보다 고작 4살 많은 [[장렬왕후|어린 아이]]를 중궁전에 앉혀놓고 [[후궁]] [[소용 조씨]]만 찾느라 [[왕비|중전]]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(찬밥 신세) 취급한 게 거의 확실하다. [[장렬왕후]]에게서 자식 보기는 고사하고 나중에 [[인조]]는 [[창경궁]]에서, [[장렬왕후]]는 [[경희궁|경덕궁]]에 거하는 등 대놓고 별거생활을 했다.] 하지만 당시 26살인 강빈은 새로 들어올 시어머니보다 11살 연상인데다 막 차기 국본인 [[경선군|원손]]을 생산한 몸이었다. 따라서 만약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다면 강빈의 입지는 탄탄대로를 걸었으리라 예상된다. [[소현세자]]와의 [[성관계|금슬]]도 여전히 좋았던 것이, 이 무렵 모친상 중임에도 [[소현세자|세자]]가 또 강빈을 임신시켰기 때문이다. 이듬해 3녀가 태어난다. 이 아이는 출생시기가 불분명하지만 [[병자호란]] 직전에 잉태한 게 거의 확실시 되는데, [[1637년]](인조 15년)생이기 때문이다. [[1636년]](인조 14년) 말 [[병자호란]]이 터지고 이후 [[소현세자]]와 강빈이 [[청나라]] 군대에 볼모로 끌려가 [[심양]]에 도착하고, 둘 다 멘탈이 나가서 한차례 앓아눕고 정신을 차린 게 [[1637년]](인조 15년) 4월이기 때문에 달수로 추정하면 무조건 [[심양]] 도착 이전이다. 여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[[소현세자]]가 --조선 기준 후레자식-- 불효자는 절대 아니었다. 소현세자는 어머니 [[인열왕후]]와 정서적 유대가 깊었으며, 어머니가 위독해지는 순간 다급해진 나머지 자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라도 살리려는 걸 [[인조]]가 극구 말렸던 실록 기록이 있다. 단지 [[소현세자]]의 행동엔 성리학적 틀에 얽매이려 않는 면모들이 은근히 꾸준히 눈에 띈다. 이는 [[소현세자]] 본인의 개성이거나 아니면 당시 사회가 아직까진 [[송시열]]의 등장 이전인 조선후기의 '초입'이라 성리학적 가치에 교조적으로 매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. [[인열왕후|어머니]]가 돌아가신 건 돌아가신 거고, 그것 때문에 재최부장기상을 치르며 12개월 동안 아내와 [[성관계|잠자리]]를 반드시 참을 필요는 없다는 의미. 하지만 조선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 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[[병자호란]]이 터지는 바람에 강빈은 청나라군을 피해 [[경선군|원손]]을 보호하고 왕실 가족을 통솔할 막중한 책임을 져야 했다. 또한 이후 적장 [[용골대]]가 "포로로 잡힌 왕실 식구 중 가장 --희귀 아이템-- 신분 높은 [[세자빈]]의 얼굴을 보고 싶다"는 등의 희롱 대상이 되어 버렸다. 이때 강빈은 얼굴을 적장에게 보여주고 절개를 지켜 자결 태그를 걷는 대신, 나름대로 꾀를 부려 위기를 모면했다. 자세한 건 후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